역사컬럼 [History Column]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

expressionism 2019. 2. 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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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



100년 전 2월 8일, 일본 동경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발표합니다.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하는데요.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특색이 있습니다.


재일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 성립된 휴전조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인이 발간한 잡지《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zer》1918년 12월 15일자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한다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 라는 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 라는 기사 등에 크게 고무되었는데요.


재일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2월 7일 일본어로 된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인쇄했고, 다음날인 2월 8일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 명 회원들의 환호 속에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재일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독립선언회의는, 관할 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인해 독립 실행방법에 대한 토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났습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우리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는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가 되었고, 국내의 민족지도자들과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 3·1 운동 발단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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